산등성이의 검은 억새가 바람에 누우면 흑풍산 전체가 먹물을 엎지른 듯 보였다.
진철 일행은 사흘 동안 능선을 올랐다. 도창수에게 맞은 옆구리가 걸음마다 욱신거렸고, 오른팔 화상은 찬바람을 받을 때마다 굳었다. 서무한은 길을 잃을 때마다 금속 봉인을 바위 가까이 댔다. 봉인의 다섯 고리 중 하나가 미세하게 떨리는 방향을 따라갔다.
연화가 먼저 이상한 점을 찾았다.
“바람은 왼쪽에서 오는데 억새는 오른쪽으로 눕네요.”
검은 억새 사이에 좁은 틈이 있었다. 바람이 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덩굴을 걷어 내고 절벽에 박힌 철문을 발견했다.
문에는 열쇠 구멍 대신 둥근 쇠판 다섯 개가 겹쳐 있었다. 각각 청동, 무쇠, 은, 주석, 이름 모를 검붉은 쇠였다. 금속판 아래에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강한 쇠를 먼저 두는 자는 힘을 얻고, 가장 약한 쇠를 먼저 두는 자는 길을 얻는다.’
서무한이 은판을 만지려 하자 진철이 막았다. 쇠판은 문 옆의 다섯 홈에 차례로 밀어 넣는 빗장이었다. 가장 깊은 첫째 홈에는 주석 가루가 남아 있었고 바깥쪽 홈일수록 단단한 판이 긁고 간 자국이 짙었다.
“강하고 약한 순서가 아닙니다.”
“그럼?”
진철은 판을 모두 빼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퉁겼다. 주석판을 첫째 홈, 곧 가장 안쪽에 넣었다. 은과 청동, 검붉은 쇠를 차례로 밀고 마지막 바깥 홈에 무쇠판을 세웠다.
“비문의 ‘먼저’는 판을 끼우는 순서입니다. 바깥 무쇠가 충격을 넓게 받고, 안쪽의 무른 주석이 남은 충격을 찌그러지며 먹습니다. 예전에 연 사람도 같은 순서로 긁어 놓았어요.”
다섯 판의 울림이 하나로 겹치자 철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망념서고에는 책 냄새가 없었다. 벽과 바닥이 모두 얇은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멀리서 되돌아왔다. 먼지는 쌓였는데 거미줄 하나 없었다.
첫 방 문턱에는 ‘집착을 되울리는 공명실’이라는 글자가 닳아 있었다. 벽에는 수백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름 아래에는 문파와 경지, 마지막 소망이 짧게 적혔다.
‘백운문 유자경, 이류 후반. 딸 앞에서 칼을 놓고 싶다.’
‘혈도방 장문악, 일류 초입. 내 손으로 죽인 이들의 얼굴을 더는 꿈꾸지 않기를.’
‘소림 속가 정해, 삼류 중반. 밭으로 돌아가고 싶다.’
대부분의 이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옆 칸에는 사망 사유가 붙었다. 배신으로 처형, 비급 유출 혐의, 주화입마로 위장. 힘을 얻으려다 죽은 이가 아니라 힘을 버리려다 죽은 이들의 명부였다.
연화는 이름을 하나씩 장부에 옮겼다.
“다 적을 셈이야?” 진철이 물었다.
“이름이 지워져서 죽은 사람들이잖아.”
연화가 마지막 이름을 베끼자 철필 끝이 이름판 아래의 가는 홈을 건드렸다. 그 말 뒤로 방 안에서 베틀 북 소리가 났다.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서고 안에는 베틀이 없었다. 그러나 북이 날실 사이를 오가는 소리, 발판이 삐걱이는 소리, 어머니가 틀린 매듭을 꾸짖는 목소리까지 또렷했다. 금속 벽 속의 연화는 손가락 다섯 개로 날실을 갈랐다. 연화는 저도 모르게 왼손을 뻗어 그 손에 겹쳤다.
북이 매끄럽게 지나갔다. 너무 매끄러웠다. 어머니라면 그 속도로 짜면 베가 운다고 등짝부터 때렸을 터였다. 연화는 이를 악물고 환영의 북을 잡아 꺾었다. 손안에서 부러진 것은 빛뿐이었지만, 그제야 자기 옆을 지나 대장간 쪽으로 걷는 진철이 보였다.
진철에게는 망치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아버지가 모루의 중심을 비켜 치는 버릇. 어머니가 저녁상을 놓으며 혼례 날짜를 묻는 목소리. 문을 열면 참사 전 오후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완벽했다.
금속 벽이 떨리며 대장간 모습을 비췄다. 아버지는 풀무 옆에 있었고 어머니는 웃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 진철의 손에는 달아오른 도끼 머리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는 울림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뛰어가면 부모를 끌어낼 수 있었다. 연화를 밖으로 보내고, 물통 뒤에 네 사람이 몸을 숨기면 될지도 몰랐다.
진철이 한 걸음 내디뎠다.
“아들, 물에 넣어라. 쇠 식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진철은 도끼 머리를 물통에 넣지 못했다. 그날의 쇠가 어떻게 울었는지, 물결이 어떤 무늬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보면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등 뒤에서 손바닥이 뺨을 때렸다.
뺨을 때린 건 연화였다. 오른손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죽은 사람 말고 산 사람 말을 들어.”
진철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화의 왼손은 다섯 손가락이 온전해 보였다가, 금속 벽의 빛이 흔들리자 다시 셋으로 돌아왔다.
“다시 할 수 있었어.”
“아니. 다시 보는 것뿐이야.”
“이번에는 구할 수도—”
“그럼 가.” 연화가 이를 악물었다. “네가 만든 기억 속에서 평생 잘 살아. 나는 손가락 셋으로 밖에 나가서 오늘 사람들 밥을 셀 테니까.”
환영 속 대장간에서 굉음이 다가왔다. 진철은 부모에게 등을 돌렸다. 금속 벽 앞의 받침쇠에는 앞선 방문자들이 내리친 망치 자국과, 한 번 부러지면 돌아오지 않을 걸쇠가 있었다. 그들이 다시 죽는 소리를 들으면서 받침쇠를 망치로 내리쳤다. 걸쇠가 부러지고 공명실의 울림이 깨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늘어지다 사라지고, 대장간은 차가운 벽으로 돌아왔다. 뒤에서 철문이 내려앉아 들어온 길을 막았다.
연화는 이미 베틀 소리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서무한은 방구석에 무릎을 꿇고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진철과 연화가 양쪽 팔을 잡아 일으킨 뒤에야 노인은 눈을 떴다.
“통과한 대가로 퇴로를 닫았군.” 서무한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받침쇠의 망치 자국을 남긴 사람들도 같은 값을 냈겠지요.”
실제로 다음 문은 열려 있었다.
안쪽 서고 중앙에는 얇은 철엽을 실로 엮은 책 한 권만 놓여 있었다. 표지에는 네 글자가 깊게 파여 있었다.
해리심경.
진철은 제목부터 의심했다. 더 강한 힘을 주는 비급이라면 이곳 이름들과 맞지 않았다. 첫 철엽에는 저자의 경고가 적혀 있었다.
‘힘을 풀려는 자여, 힘을 모르는 채 손대지 말라. 닫힌 눈은 결을 볼 수 없고, 느린 몸은 결에 닿지 못하며, 빈 손은 결을 움직이지 못한다.’
첫 장에는 지금 익힐 세 갈래만 자세했다. 기의 큰 흐름을 느끼는 심안, 자연기를 중성으로 거르는 해기, 충돌에서 반 발 비키는 이형신법의 첫 보법 유영보. 감지 단계의 해기는 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뒤 철엽에는 분석, 간섭, 종합, 해체라는 제목만 닫혀 있었다. 남의 운기에 닿는 간섭은 일류 이후, 단전을 안전하게 푸는 해체는 환골탈태 이후였다. 지금의 진철은 도창수보다 느렸고, 누구의 힘도 빼앗을 수 없었다.
“왜 웃어?” 연화가 물었다.
진철은 그제야 입꼬리가 움직인 것을 알았다.
“적어도 오늘 당장 고수가 된다고 속이지는 않아서.”
“이건 폐공법이 아니라 폐공까지 가는 길이군요.” 진철이 말했다.
“못 갈 수도 있는 길이지.” 서무한이 철엽을 덮었다.
진철은 수련 첫 장을 읽었다. 감지의 시작은 닫힌 영혼에 작은 상처를 내는 일이었다. 평범한 입문법처럼 공포로 찢는 방식과 달리, 이미 생겼던 상처의 결을 찾아 의식적으로 벌렸다. 그 틈으로 들어온 자연기를 호흡으로 걸러 해기로 바꾸어야 했다.
그의 상처는 청계촌에서 열리다 아물었다. 책에는 그런 흔적을 가진 사람이 드물며, 다시 여는 과정에서 그날의 고통이 돌아올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연화가 책을 덮었다.
“하지 않아도 돼.”
“해야 해.”
“방금 전까지 아이들을 찢어 무인으로 만드는 걸 욕했잖아.”
“남이 찢는 것과 내가 고르는 건 달라.”
“상처는 네 선택을 알아보지 못해.”
진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등을 타고 참사 때의 열이 올라왔다. 호흡을 끊고 책을 덮고 싶은 몸과, 그 책을 놓치고 싶지 않은 손이 서로 버텼다.
그는 철엽을 다시 펼쳤다.
“그래서 당신이 기록해 줘. 내가 왜 시작했는지, 어디서 틀렸는지. 틀리면 멈추게 해.”
연화는 선뜻 승낙하지 않았다.
“멈추라면 멈출 거야?”
“이유를 듣겠어.”
“여전히 네가 마지막 판정을 하겠다는 말이네.”
“지금은 그것밖에 약속 못 해.”
연화는 오래 그를 노려보다 장부의 빈 장을 펼쳤다.
“수련을 허락하는 게 아니야. 내가 못 막으니 조건을 거는 거야. 원본 철엽은 내가 보관하고, 넌 첫 장만 베껴. 공명구는 수련할 때 말고는 서 선생이 맡아요. 사람을 상대로 쓰려면 우리 둘과 피해 당사자 과반이 먼저 동의해야 해.”
“어기면?”
“공동금, 숙소, 소식망을 끊고 책을 회수해. 그래도 하겠다면 혼자 하게 될 거야.”
서무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해리심경 원본을 연화 쪽으로 밀었다.
“그 조건으로 시작할게.”
진철은 첫 수련 자리에 앉았다. 서무한은 길만 짚어 주고 물러났다. 이 무공을 전수할 사람은 책밖에 없었다.
호흡을 억지로 깊게 하지 않았다. 참사 직전 모루에 전해진 진동을 떠올리고, 그보다 더 안쪽의 울림을 찾았다. 등에 난 화상이 뜨거워졌다. 배꼽 아래에서 바늘 끝 같은 통증이 일었다.
문을 열면 부모가 죽는 오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철은 피하지 않았다. 굉음과 끓는 물, 살 타는 냄새가 순서대로 돌아왔다. 그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호흡만 셌다. 셋에 들이쉬고, 둘에 머물고, 다섯에 내쉬었다.
아물어 붙었던 상처가 아주 조금 벌어졌다.
산속의 찬 기운이 그 틈으로 밀려들었다. 욕심내어 잡으려 하자 통증이 커졌다. 들숨 끝을 줄이고 날숨을 길게 빼자 뜨겁고 차가운 기운은 흩어지고, 어느 쪽 성질도 띠지 않은 머리카락만 한 한 줄이 배 아래에 남았다.
해기였다.
그것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러나 진철의 온몸은 땀에 젖었다. 그는 무릎을 짚고 토했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벽 너머 고수의 기운이 보이는 일도 없었다. 겨우 금속 봉인의 떨림이 손바닥과 배 아래에서 동시에 느껴졌을 뿐이다.
“아직 삼류 초입에도 못 미쳐.” 서무한이 맥을 짚으며 말했다. “세 호흡 뒤 맥이 끊기네.”
연화는 장부에 그대로 적었다. ‘해기 한 줄. 세 호흡 유지. 구토 한 차례.’
서무한이 내준 때에만 진철은 부모의 유골에서 건진 못 세 개를 꺼냈다. 서고 한쪽의 작은 화로를 살리고, 서로 다른 소리를 죽이지 않도록 고리 하나에 엮었다. 무기가 아니었다. 해기를 몸 안에 돌릴 때 어떤 못의 떨림을 먼저 감지하는지 확인할 수련구였다.
첫 공명구가 완성될 무렵, 산 아래에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연화가 다리에 묶인 쪽지를 펼쳤다. 물레골 소식망이 보낸 것이었다.
‘도창수, 보호비 두 배 요구. 사흘 뒤 곡식과 아이 하나를 데려가겠다 함.’
연화의 얼굴이 굳었다.
진철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유영보 첫 자세를 잡았다. 한 걸음에 옆구리가 쑤셨고 해기는 금세 흩어졌다.
“사흘이면 내려갈 수 있어.”
“수련할 시간은?” 서무한이 물었다.
“가는 동안 숨을 쉽니다.”
세 사람은 해가 뜨기 전에 망념서고를 나섰다. 원본은 연화의 짐에, 공명구는 서무한의 약갑에 따로 들어갔다. 진철은 베껴 쓴 첫 장을 품고 유영보의 첫 반 걸음을 디뎠다. 검은 억새가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짐을 스치며 한 방향으로 누웠다.